영어를 듣고 이해하는 듯한데 좀처럼 말하지 않는 아이를 보면, 부모님은 언제 입을 열지 궁금해져요. 언어 습득 연구에서는 말하기가 적은 초기 시기를 ‘침묵기’라고 설명하기도 해요. 다만 듣기만 하면 누구나 같은 시기에 말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이 설명으로 잘 알려진 크라센의 가설과, 말하기·쓰기의 역할을 강조한 반론을 함께 볼게요.

1982년, 다섯 개의 가설

크라센은 1982년 『제2언어 습득의 원리와 실제(Principles and Practice in Second Language Acquisition)』에서 제2언어 습득에 관한 다섯 가지 가설을 정리했어요.

  1. 습득-학습 가설: 언어를 익히는 길은 둘로 나뉘어요. 의미 있는 의사소통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익히는 '습득'과, 규칙을 의식적으로 배우는 '학습'이에요. 크라센은 실제로 말을 유창하게 하는 능력은 습득에서 나온다고 봤어요.
  2. 모니터 가설: 의식적으로 배운 규칙은 말이나 글을 점검하고 고치는 '모니터' 역할만 한다는 가설이에요. 이 모니터는 시간이 충분하고,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며, 규칙을 알고 있을 때 작동해요.
  3. 자연적 순서 가설: 문법 요소는 예측할 수 있는 순서에 따라 습득된다는 가설이에요.
  4. 입력 가설: 학습자가 현재 수준(i)보다 조금 높은 수준(i+1)의 입력을 이해할 때 습득이 일어난다는 가설이에요. '이해 가능한 입력(comprehensible input)'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어요.
  5. 정의적 여과 가설: 불안, 동기, 자신감 같은 정서적 요인이 입력이 습득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여과기'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에요. 불안이 높거나 동기와 자신감이 낮으면 여과가 높아진다고 설명해요.

자연적 순서와 '형태소 연구'

자연적 순서 가설은 크라센이 처음 관찰한 것이 아니라 1970년대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거예요. 하이디 덜레이(Heidi Dulay)와 마리나 버트(Marina Burt)는 1974년, 영어를 제2언어로 배우는 스페인어권과 중국어권 아이들의 영어 문법 형태소 사용을 비교했어요.

두 집단은 평소 쓰는 첫 언어가 달랐지만 문법 형태소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순위가 비슷하게 나타났어요. 이 연구에서 비교한 집단별 정확도 순위를 모든 아이가 같은 순서·속도로 배운다는 규칙으로 옮길 수는 없어요. 예를 들어 he runs의 3인칭 단수 -s와 John's의 소유격 -s는 늦게 습득되는 형태로 나타났어요. 같은 해 베일리(Bailey), 매든(Madden), 크라센은 성인 학습자에게서도 아이들과 비슷한 순서가 나타난다고 보고했어요. 3인칭 단수 -s는 규칙 자체는 단순하지만 습득 순서에서는 늦게 나타나는 예로 거론돼요.


침묵기에서 유창성까지

크라센의 이론은 교실 수업 방법으로도 이어졌어요.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던 트레이시 테렐(Tracy Terrell)은 1977년 '자연적 접근법(The Natural Approach)'을 제안했고, 1983년 크라센과 함께 같은 이름의 책을 펴냈어요.

크라센과 테렐의 책은 말하기 전 단계, 초기 발화, 말하기 출현의 세 단계를 제시했어요. 이후 일부 교사용 안내서는 중급 유창성과 고급 유창성을 더한 다섯 단계로 정리해요. 아래는 네브래스카 교육부의 2020년 교사용 안내서에 실린 구분이에요. 안내 자료에 따라 단계 수나 이름은 다를 수 있으며,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발달 일정표는 아니에요.

  1. 말하기 전 단계(preproduction): 흔히 침묵기라고 부르는 단계예요. 학습자는 주로 듣고 이해하는 데 집중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으로 가리키는 식으로 반응해요. 해당 안내서는 0~6개월이라는 대략적 범위를 제시하지만, 특정 아이의 말하기 시작 시점을 예측하거나 판단하는 상한은 아니에요.
  2. 초기 발화(early production): 한 단어나 짧은 구, 통째로 외운 표현으로 답하는 단계예요.
  3. 말하기 출현(speech emergence): 더 긴 구와 간단한 문장을 쓰기 시작하는 단계예요.
  4. 중급 유창성(intermediate fluency): 대화를 이어 가고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단계예요.
  5. 고급 유창성(advanced fluency): 다양한 상황에서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단계예요.

자연적 접근법은 이해가 표현보다 먼저 온다는 원리를 앞세우고, 학습자에게 말하기를 서둘러 요구하지 않는 수업을 제안했어요. 단계별 기간은 학습자마다 다르다는 점도 함께 강조됐어요.

비판, 그리고 출력과 상호작용

크라센의 가설은 큰 영향력만큼 비판도 받았어요. 배리 매클로플린(Barry McLaughlin)은 1978년 논문에서 모니터 모형의 근거 연구를 방법론적으로 비판했어요. 의식적인 규칙 학습과 무의식적 습득을 별개 과정으로 놓고, 전자를 말하기의 점검 역할에 한정하는 설명이 연구 자료를 충분히 설명하는지를 검토한 거예요. 이 논문은 대안적인 정보 처리 설명도 제안했어요. 따라서 모니터 가설을 당시부터 학계 전체가 받아들인 확정 법칙처럼 설명할 수는 없어요.

입력만으로 충분한가에 대한 반론도 나왔어요. 캐나다의 언어학자 메릴 스웨인(Merrill Swain)은 1985년 '출력 가설(output hypothesis)'을 제시했어요. 스웨인은 입력을 이해하는 일과 정확하게 말하고 쓰는 일을 구별하고, 언어를 직접 산출하는 과정에도 학습을 돕는 역할이 있다고 설명했어요. 2005년에 정리한 저술에서는 출력의 기능으로 자신의 언어 지식에 부족한 부분을 알아차리기, 표현에 대한 가설을 시험하기, 언어 형태를 되돌아보고 성찰하기를 다뤄요. 즉 말할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과제가 아니라는 설명이에요. 이는 출력의 역할에 관한 가설과 연구 설명으로, 아무 자료나 반복해 말하면 모든 문법 요소가 자동으로 습득된다는 보장은 아니에요.

크라센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충분히 듣고 읽는 일에 주목했어요. 반면 후속 논의는 직접 말하고 쓰면서 부족한 표현을 알아차리는 일에도 주목했어요. 어느 한쪽의 설명만으로 모든 아이의 학습 과정을 판단하기보다, 가설이 각각 무엇을 설명하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교사용 안내서의 단계는 아이가 보이는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참고 자료예요. 말을 시작해야 하는 기한을 정한 검사표가 아니에요. 말이 적다는 이유로 억지로 대답을 요구하거나, 정해진 기간이 지날 때까지 말하기를 모두 미룰 근거로 삼기보다는, 아이가 어떤 말을 이해하고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 읽는 안내로 볼 수 있어요.

참고 자료

이 글의 이미지는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AI로 제작한 설명용 이미지입니다.